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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루의 문화 포커스]- 국립고궁박물관
 
이미루 기자   기사입력  2018/12/04 [12:27]

 

▲     ©이미루 기자

 

조선왕실의 문화가 품격 있게 담겨있는 곳, 국립고궁박물관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 유홍준 

 

새로운 문화모임의 장소

옛 왕조의 도읍답게 서울에는 조선의 5대 궁궐인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창경궁, 경희궁 등이 있어 현대적인 건물들과 묘한 조화를 이루며 도시를 신비하고도 아름답게 만들고 있다. 궁궐이 왕실의 공간적 생활을 엿보게 해주는 곳이라면 왕실의 역사와 실생활, 왕실문화를 자세하고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있다. 바로 '국립고궁박물관'이다. 이곳은 문화구매력이 높아진 최근의 시류를 타고 온가족의 나들이 장소나 만남의 장소로 부상하고 있는데 이는 교통이 편리하다는 장점 외에도 경복궁 바로 옆이며 삼청동, 북촌 등과 가깝다는 거리적 이점으로 연계 방문이 가능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무료임에도 수준 높은 전시로 관람객에게 감동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국립고궁박물관은 조선 건국에서부터 대한제국에 이르기까지의 조선왕실 및 대한제국황실과 관련된 유물을 보존 전시하고 그 가치를 널리 알리고 있다. 규모는 지하 1층부터 지상 2층까지의 3개 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문이 2층인 구조로 되어 있다. 여기에는 10여개의 전시실이 있고 약 2천여 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정문이 있는 2층에서 시작해 1층을 거쳐 지하 1층의 순으로 관람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람방법이다.  

▲ 어좌와 일월오봉도    ©이미루 기자

 

국왕이라는 이름의 위엄과 무게

2층 첫 번째 방의 '조선의 국왕'을 시작으로 조선의 이야기가 전개되었다. 첨단의 디지털 기술을 이용한 입체영상과 한글, 영어자막으로 왕실문화와 예법에 관한 상징과 철학 등 전반적인 왕실 문화를 세부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어좌일월오봉도가 전시되어 있는 곳에 유난히 관람객들이 몰려 있었다. 왕의 존재와 위엄을 상징하며 왕조의 영원과 백성들의 태평성대를 염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일월오봉도는 실내외를 막론하고 왕이 있는 곳의 어좌(御座) 뒤에 놓았던 그림이다. 임금이 죽었을 때 신주를 모셔 두는 장소와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御眞)을 봉안하는 곳에도 일월오봉도를 항상 놓아두었다고 한다. 그림을 자세히 보고 있자니 해와 달을 포함해 천지만물이 뒤에서 왕을  보좌하며 왕의 권위에 순복하는 것 같았다.

 

한쪽 칸에는 어진을 모셔놓은 곳이 있었다. 어진은 선대왕들을 추모하며 왕실이 번창하고 나라전체가 번영하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그렸다고 하는데 대부분 소실되어 현재 남아있는 어진은 태조 영조 철종의 어진뿐 이라고 한다. 어진을 그릴 때는 왕의 겉모습뿐 아니라 인품과 위엄까지 표현해야 했다고 하니 초상화 하나에도 심오한 철학과 예술성을 추구했다고 볼 수 있겠다.

  

기록의 나라답게 여러 기록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임금의 일상 언행뿐 아니라 교육현장 및 왕실의 행사 등이 면밀히 기록된 실록과 의궤 등이 있었다. 왕들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감시카메라처럼 사관에 의해 기록된다는 점에서 많은 스트레스에 시달렸을 것 같다. 의궤는 나라와 왕실의 행사를 꼼꼼히 기록한 책으로 정조대왕의 8일간의 화성행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가 원본은 아니지만 세세히 소개되어 있었다. 이밖에 왕실 족보인 선원록과 왕들의 업적 중 치적의 내용만을 담은 유네스코 무형문화재인 국조보감등이 있었다.

▲   원행을묘정리의궤 앞의 관람객들  ©이미루 기자

 

왕이 된다는 일은 평생 공부에 힘써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왕의 일상은 새벽 4시에 시작되었으며 경연(經筵)이라는 평생교육을 받아야했다. 경연은 조강(朝講 해드는 시간에 하는 강의), 주강(晝講 정오 무렵에 하는 강의), 석강(夕講 오후 2시경에 하는 강의)의 하루 3번이 기본이었고, 소대召對와 야대夜對와 같은 비정규적인 강의도 있었다. 왕이 되기 위해서는 왕세자 시절 때부터 서연(書筵)이라는 조기교육을 받아야 했는데 3세가 되면 본격적인 조기교육이 시작되었다. 왕이 되는 일은 오랜 훈련과 노력을 구하는 일이며 나라와 백성의 안위를 위해 평생 공부하는 일이었다

 

▲  황실의 주칠가구들    ©이미루 기자

 

황실의 생활품들

왕실의 생활실에는 궁중의상, 인장 및 문방구, 장신구와 그릇, 가구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왕이 즉위식 때 입는 예복을 구장복이라고 하는데 용, , , 불꽃, 술잔, 수초, , 도끼, 불 등의 9가지 무늬가 들어가 있으며 왕의 권위와 덕목 등을 상징한다고 한다. 왕비의 대례복은 적의라고 하며 머리에 쓰는 가채는 19Kg에 육박한다고 한다. 대례복에는 사리분별, 모성애 ,아름다움을 갖추었다고 상징되는 꿩의 무늬가 온통 수놓아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여성에게는 모성애라는 틀을 주입시키는 것 같았다.

 

궁중에서 사용했던 그릇이나 왕실의 침전 등은 화려함이 없이 소박하고 정갈한 느낌이 들었다. 왕실의 가구들은 붉은 주칠이 특징인데 붉은 색은 왕실의 상징이므로 일반 사가에서는 붉은 주칠가구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인장이었다. 인장은 도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왕의 인장은 어보라고 한다. 어보는 국가와 왕권을 상징하는 예물로 공들여 포장해서 각별하게 보관하였다고 한다. 어보가 완성되면 보자기로 싸서 금전지로 장식한 띠로 묶은 다음 내함, 외함에 넣어 자물쇠로 봉하였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태조임금 금보를 비롯 정조의 효심이 담긴 어보 등이 전시되어있었다.

 

놀라웠던 점은 후궁을 포함해 많은 왕실의 여인들에게도 각각의 인장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인장은 왕가의 일원임을 나타내주는 신분증명서와도 같았으며 별도의 사유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던 왕가의 여성들에게는 인장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리학과 유교의 나라에서 여성소유권을 위한 인장이 존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멋있는데 인장의 형태마저 예술적 기품을 품고 있었다. 왕과 왕비의 인장은 거북이 모양이며 공주와 후궁의 인장은 사자모양이다.

▲  왕실 여인들의 인장들   ©이미루 기자

 

▲  덕온공주인장   ©이미루 기자

 

돌아온 덕온공주 인장

2018418, 미국 뉴욕의 크리스티 경매장에 화려한 인장 하나가 출품되어 치열한 응찰을 불러왔다. 어느새 시작가인 약 2만 달러의 10배까지 올라갔고 곧 2375백 달러의 가격으로 경매가 종료되었다. 숨 가쁜 경매를 통해 낙찰 된 이 유물은 바로 조선의 마지막 공주인 덕온공주(1822~1844)의 인장이었다. 이 유물의 낙찰자는 우리나라 문화재청 산하기관인 국외소재 문화재재단’으로 인장 환수에 대한 방법을 고심하던 중 이 인장이 미국 경매장을 통해 공개될 거라는 보도가 나가며 환수의 어려움이 생기게 되자 경매에 참여해 낙찰을 받아낸 것이다. 조선의 운명과도 닮은 덕온공주의 인장은 이렇게 복잡하고도 힘겨운 과정을 거쳐 올 5월 우리나라로 되돌아왔다. 국립고궁박물관에서는 20181231일까지 2층 왕실의 생활실에서 이 인장을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덕온공주는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의 셋째 딸로 8세가 되던 1829년에 '덕온'이란 작호와 함께 녹봉과 토지를 받았고 16세 때인 해평 윤씨 가문의 윤의선과 혼인하면서 궁궐 밖의 살림집으로 나가 살다가 23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조선의 마지막 공주이다.

 

덕온공주의 인장은 구리 재질로 가로 8.9, 세로 8.9, 높이 8.6크기이며 공예 기법이 매우 정교하고 보존 상태가 양호해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국가소유 공주 인장은 덕온공주 인장이 유일하다고 한다. 비록 경매를 통해서 환수되어졌지만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 한 점이 다시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덕온공주의 인장은 도난 문화재로 분류되어 있지 않으며 반세기 전에 미국에서 이미 거래가 됐던 점에 미루어 정확한 반출 경위를 밝히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대한제국 - 근대화를 향한 몸부림

1층에는 대한제국실이 있다. 외세의 간섭을 받지 않는 당당한 근대국가로의 시작을 알리기 위해 고종은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이라고 선포했다. 대한제국은 교통, 금융, 통신, 의료, 교육 등에서 서구선진문물을 적극 도입하며 근대국가의 모습을 점차 갖추어 가고 있었지만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제에 의한 강제 합병으로 13년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그러나 대한제국기의 이러한 독자적 근대화의 경험은 일제강점기에 민족적 자긍심을 유지하고 광복 이후 대한민국이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역사가들은 말한다.

 

전시실에는 왕실의 서구식 복장과 경운궁, 창경궁 내부의 일부가 전시되어 있었다. 응접실과 식당, 서구식 식기들, 와플 조리기 등 가구 및 생활용품들을 보면 왕실 내에서도 서구의 물품과 문화를 적극 수용하며 근대화를 향한 열망과 의지를 강하게 불태웠음을 알 수 있다.

 

▲    앞의 차가 순종의 차이며 뒤의 차가 순종황후의 차이다.   © 이미루 기자

 

리무진 - 어차

1층 로비에는 순종 황제와 순종효황후의 어차가 전시되어 있다. 아마 이곳이 이 박물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장소일 것이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자세히 탐구하듯 들여다보며 기념사진을 찍고 오래오래 지켜보고 있었다.

 

마차 같이 생긴 차는 대한제국 제2대 황제 순종이 타던 것이고 그보다 더 부드러워 보이는 차는 순정효황후가 타던 것이다. 1997년 문화재청과 현대자동차가 5년에 걸쳐 수리,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순종황제 어차는 1918년 산 '캐딜락 리무진'으로 전 세계적으로 20여대만 남아있고 순종효왕후의 어차는 1914년 산 영국 '다임러사의 리무진'으로 우리나라 最古의 차이며 세계적으로도 단 3대만 남아있는 희귀한 차이다. 두 차 모두 차체는 목재이고 칠로 도장한 것이다. 차문에는 대한제국의 상징인 황금색 오얏꽃 문양이 새겨져 있다.

 

에필로그

국립고궁박물관은 조선왕실과 대한제국 전문박물관이라는 특성을 잘 살려서 다양하고 가치 있는 왕실문화및 유물을 조화롭게 배합해서 품격있게 전시해 놓았다. 전시된 유물의 내용 및 전시동선, 첨단 디지털 기술을 이용한 전시기법이나 문화재에 대한 적절한 안내 등은 조선 왕조의 역사와 문화를 더 깊이 이해하고 수용하여 자긍심을 갖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전시를 돌아보면서 느낀 것은 어쨌거나 왕으로 태어난 이상 왕 자신이 입고 먹고 의식을 행하는 모든 것들이 왕조뿐 아니라 나라와 백성의 안위와 반드시 결부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군림하여 누르는 통치자가 아니라 늘 백성을 생각하는 왕(일부 폭군이 있었지만), 그래서 평생 공부해야 하는 왕, 생각보다 소박한 왕가의 물품과 내전의 모습에서 조선의 품격과 기품을 볼 수 있었다. 또한 나라를 끝까지 지키려했던 대한제국의 필사적인 노력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조선왕조는 일제에 침탈당한 일로 오백년의 역사가 폄하되어버리는 측면이 있다. 왕정은 인류역사의 한 부분이므로 지배와 피지배의 이분법적인 역사관으로만 왕정의 시대를 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렇게 수준 높은 박물관은 하루에 모두 관람하는 것보다 시간이 날 때마다 들러서 자세히 하나씩 보는 것이 좋겠다. 또한 주변에 위치한 고궁을 산책하며 마음의 여유를 느껴볼 것을 추천한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고궁을 거니는 외국 관광객들의 행복한 미소를 보는 것도 또 다른 즐거움이다.

▲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바라본 경복궁입구  © 이미루 기자

 

▲ 이미루 기자     ©전남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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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12/04 [12:27]  최종편집: ⓒ 전남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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