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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지나간 자리_블랙홀
 
강대선   기사입력  2018/11/02 [10:26]

 

블랙홀

 

오탁번

 

 

같은 동네에 사는 이종택과 함께

백운지 아래 방학리에 사는

초등학교 동창 김종명이네 집에 놀러 갔다

멍석이 널린 고추가 뙤약볕같이 따갑고

함석지붕에는 하양 박이 탐스러웠다

누렁이 한 마리가 마당에서

제 똥냄새 맡다가 꼬리를 쳤다

찰칵! 한 장 찍고 싶은

우리 농촌의 옛 풍경 속으로

재작년 추석 무렵에 무심코 쑥 들어갔다

 

안방에서 머리가 하얀 안노인네가 나왔다

어릴 때 친구 집에 놀러 가면

나는 어른들께 답작답작 큰절을 잘했다

그러면 친구 어머니가 씨감자도 쪄주고

보리쌀 안쳐 더운밥도 해주곤 했다

종명이 어머니가 여태 살아계시는구나!

나는 얼른 큰절을 하려고 했다

 

그 순간 몇 반분의 1초의 시간이 딱 멈추었다

종명이가 제 어머니에게 말하는 소리가

우주에서 날아오는 초음파처럼 아득하게 들려왔다

-임자 술상 좀 봐!

초등학교 마누라에게 큰절할 뻔한 나는

블랙홀에 빠진 채 허우적거렸다

 

머리가 하얀 초등학생 셋은

무중력 우주선을 타고

저녁놀 질 때까지 술을 마셨다

-방학리에 왔으니 학 한 마리 잡아다가

안주로 구워먹자 씨벌!

종택이와 종명이는 내 말에 장단을 맞췄다

-그럼 그렇고 말고지, 네미랄!

광속보다 빠르게 블랙홀을 가로지르는

학을 쫓아가다가

그만 나는 정신을 잃고

종택이 경운기에 실려 돌아왔다

 

 

시인 오탁번

1943 충북 제천시 백운면 평동리 169번지에서 출생. 1998년 계간시지 시안창간 제8시집 우리 동네외 다수. 현재 고려대 명예교수

 

 

 

 

詩說 강대선

▲     ©강대선

 

 

 

『시와 사람으로 등단. 구름의 공터에 별들이 산다외 시집 3. 모던포엠 문학상, 국제펜광주 올해의 작품상, 광주시인협회 올해의 작품상, 여수해양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수상. 현 광주여상고 교사.

 

 

 

 

 

 

시인의 블랙홀은 시간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다. 초등학생이었던 시인은 이제 머리 하얀 안노인네를 친구 마누라로 둔 나이에 이른 것이다. 시인의 나이를 누가 빨아들였는가. 아득하다. 시간의 지나감이 광속보다 빠르게지나가고 있다. 방학리에 와서 다시 초등학생이 된 시인과 친구들은 학 한 마리 잡고 싶고 학을 쫓아가고싶다.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던가. ”씨벌!, 네미랄이 더 눈물겹다. 경운기에 실려 돌아오는 시인의 취함이 어찌 시인만의 것이겠는가. 시간은 광속보다 빠르다. 지금 이 순간도 어디론가 빨려 들어갈 것이다. 다시 오지 않는 시간. ‘카르페 디엠’(오늘을 즐기라)을 외쳐도 지나간 시간들이 주는 서글픔은 여전히 가슴에 사무친다. 씨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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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11/02 [10:26]  최종편집: ⓒ 전남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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